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필리핀 해 해전 (문단 편집) === 미군의 사정 === [[미드웨이 해전]]에서 전환점을 맞이하고 [[과달카날 전투]]로 대변되는 솔로몬 전역의 소모전 이후로, 태평양전쟁은 줄곧 미군의 일방적이고도 착실한 공세 일변도였다. 과달카날 전투 이후로 쏟아져나온 미국의 물량은 이러한 미군의 공세를 든든하게 뒷받침했다. 게다가 신병기들은 물량뿐만 아니라 퀄리티도 일본군의 그것을 압도했다. 미군의 진격은 크게 두 갈래로 이뤄졌는데, 하나는 미 해군 함대 총사령관 겸 참모총장 [[어니스트 킹]] 제독이 입안하고 태평양 함대 사령관 [[체스터 니미츠]] 제독이 실행을 총괄하던 중부태평양 돌파이고, 다른 하나는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주장한 육군 위주의 뉴기니-민다나오 축선으로의 진격이었다. 전자는 중부 태평양 한가운데의 섬들을 하나하나 점령하여 이를 발판으로 남아있는 일본 함대의 활동을 제한하여 상륙군의 안전을 확보한 뒤, 대만과 중국을 거쳐 일본으로 향하는 것이었고, 후자는 태평양 남서쪽에 띠처럼 이어진 섬들을 따라 북상하여 필리핀을 재탈환하고 미군이 일본에게 필리핀을 빼앗기기 전에 지어두었던 군사시설과 일본군이 새로 지어둔 군사시설을 확보하여 필리핀을 병참기지화시킨 뒤, 여기서 단번에 일본으로 진격하는 안이었다. 이 두 가지 안은 둘다 그럴듯한 명분과 실질적 이득이 있었기 때문에 서로 절충점을 찾지 못했고, [[쌍수호박|결국 '''두 가지 안 모두 실행하는 것'''으로 결론이 난다.]] 그리고, 그 다툼의 와중에 어니스트 킹 제독은 미 육군항공대의 지지를 얻고자 마리아나 제도의 점령을 제시하게 된다. 마리아나 제도는 미 해군 입장에서는 일본 본토 침공을 위한 훌륭한 전진기지가 될 수 있었고 미 육군항공대 입장에서는 B-29의 안정적인 작전기지[* 마리아나 제도 점령 이전에는 중국에서 B-29를 출격시켰지만 보급이 쉽지 않았고 [[대륙타통작전|작전기지가 일본군의 공격에 노출되는 등의 문제]]가 있어서 제대로 된 작전을 펼칠 수 없었다.]가 될 수 있었다. 서로의 이해가 맞아떨어지면서 1944년 6월을 예정으로 마리아나 제도 침공이 결정되었다. 마리아나 침공을 총 지휘할 현장 지휘관은 [[미드웨이 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레이먼드 스프루언스]] 제독이었다. 당시 그는 중부태평양해역군(뒤에 제5함대로 개명됨.)의 총지휘관이었으며 그의 휘하에는 강력하고도 거대한 고속항모기동부대, 상륙부대, 보급부대들이 있었다. 중부 태평양 돌파의 핵심 전력인 [[고속 항공모함 기동부대|제58기동부대]]의 지휘관은 [[마크 미처]] 제독이었다. 사실 그는 스프루언스 제독과는 불편한 관계에 있었다. [[미드웨이 해전]]에서의 삽질과 보고 누락 및 은폐로 인해 당시 직속상관이었던 스프루언스의 눈밖에 나버렸던 그는 한동안 수상기 기지 사령관 등 한직을 전전해야 했다. 당시 이제 막 본격적으로 자리잡기 시작한 항공병과 안에서는 주요 인재였기 때문에 얼마 안 가 과달카날 등 주요 전장에 배치[* [[과달카날 전역]]이 끝난 뒤 캑터스 비행단이 확대 개편되면서 신설된 솔로몬제도 항공사령관으로 배치되었고, 그가 재직하던 시절에 [[야마모토 이소로쿠]] 암살계획이 진행되어 그 실무를 총괄하기도 했다.]되긴 했지만 항모기동부대 근처에는 얼씬도 못 했다. 그러나, 1943년 11월의 길버트제도 침공작전[* [[타라와 전투]]가 이 작전 중 일어난 격전이다.]에서 그 당시 막 몸집을 불린 항모기동부대의 소극적인 운용과 미숙함이 드러나자 [[윌리엄 홀시]] 제독을 비롯한 항공병과 제독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아서 항모기동부대에 복귀하게 되었다. 이른바 미처 샴푸로 불리는 미처제독 특유의 공세적인 항모운용[* 강력한 거점을 상대로 거점의 방어가 취약한 시간대를 골라 먼저 전투기들을 보내서 적 항공기들을 우선 청소하자마자 공격기,폭격기들을 보내 지상의 대공화망과 활주로 같은 항공기 운용시설을 공격하여 적 거점의 방어력을 떨어트린 뒤에 지상의 기반시설들을 마지막으로 박살내는 방법이었다. 기존의 전투기,공격기가 혼재된 공격 방식보다 아군의 피해는 줄이면서 적 거점의 전투력, 특히, 항공세력을 제대로 거덜내버리는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이 마셜제도 침공과 [[헤일스톤 작전|트럭환초 공격]]에서 진가를 발휘하자 스프루언스도 그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미처제독 말고도 제58기동부대에는 그 당시 미 해군안에서 쟁쟁한 인재들이 포진해 있었다. 전쟁 초기에 일본 해군의 등쌀에 기를 못 펴던 미해군 구축함대에 새로운 전술로 구축함대의 진가를 되살린 [[알레이 버크]] 제독이 미처 제독의 참모장으로 있었으며, 휘하 참모들과 항모 전단장 및 각 항모의 함장들 또한 유능한 인재들로 채워져 있었고, 항모들의 호위역인 고속전함부대는 [[과달카날 해전]]에서 승리한 윌리스 리 제독이 지휘하였다. 이들 휘하의 영관급 지휘관들도 유능함으로 따지면 순위권에 드는 인재들이었으며, 심지어 미처 제독 옆에는 일본군의 무선 감청 내용만 전문적으로 분석하여 보고하는 전담 장교가 붙어 있었다. 이렇게 덩치뿐만 아니라 실력까지 끌어올린 미해군 항모기동부대는 1944년 들어서 일본군의 외곽 방어선을 마구 뒤흔들어 놓는 대활약을 벌이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